2014년 11월 4일 화요일

비료의 역사

퇴비는 농업이 시작된 때와 거의 동시에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뼛가루, 재, 건혈, 초석, 구아노, 물고기 등의 사용이 토지나 작물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기 훨씬 전부터였다. 미개간지가 없어지는 한편 비료의 제조기술과 수송능력이 향상됨에 따라 필요한 식량과 섬유를 생산하는 데 있어서 비료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비료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식물생장에 대한 양분의 기능을 이해해야 한다. 고대 로마인은 이미 BC 200년부터 AD 100년말에 윤작, 산성토양에 대한 석회의 사용, 두엄의 사용, 공기 중의 유리 질소를 고정하는 콩과 식물의 재배 등의 경험을 바탕으로 토양 비옥도에 관한 지식을 쌓아왔다. 화학자들이 식물 양분에 관한 연구를 시작한 것은 약 1750~1800년이다. 1804년 스위스의 테오도르 드 소쉬르가 정량법을 사용하여 몇 가지 중요한 원리를 확립했다. 1834년 프랑스의 장 바티스트 부생고는 처음으로 포장시험을 했다. 1840년 독일의 유스투스 폰 리비히는 식물이 영양분을 부식물로부터 섭취한다고 하는 부식설을 부정하는 몇 가지 새로운 이론을 창안하여 농업의 비옥성 연구에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1886년 독일의 헤르만 헬리겔과 H. 빌파르트가 어떤 종류의 미생물은 콩과식물의 뿌리에 작은 혹을 형성하여 공기로부터 질소화합물을 만들어낸다는 것(공중질소고정)을 알아냈다. 1880년대 후반부터는 더 나아가서 필수요소의 측정, 시비의 최적시기, 비율, 방법, 비료조성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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